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할힌골 전투 (문단 편집) == 결과와 영향 == [[일본 제국]]은 [[소련군]]도 과거 [[러시아 제국군]]처럼 오합지졸일 것이라고 오판하고 있었고, 무엇보다 [[러일전쟁]]의 승전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된 정산을 못 받았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래서 [[러시아 내전]] 시기 [[일본의 시베리아 개입|시베리아를 침공하는 등]] 수시로 소련의 영토에 대한 야욕을 내비쳤는데 이 전투에서 대판 깨지자 러일전쟁을 정산할 생각은 두 번 다시 못하게 되었다. 그 결과 일본은 소일불가침조약을 맺고 소련과의 전면전을 포기하였고 그 덕에 소련은 가장 긴박했던 시기 극동 정예군 일부를 대독 전선에 투입할 수 있게 되었다. 일본군의 경우 전투의 교훈으로 당연히 서둘렀어야 했던 전차 및 포병 화력의 확충과 할 전차의 성능 개선은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당시 일본의 국방예산이 해군 및 항공 쪽에 좀 더 집중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만만치 않은 예산을 받은 육군 내에서도 그다지 높은 우선순위를 부여받지 못했다. 또한 소련군의 기갑 부대에 의해 방어선이 돌파당하고 포위당했음에도 불구하고, 전술 면에서 전차의 집단 운용에 의한 기동전을 고려하거나 그러한 전차 중심의 기동전에 대비한 흔적도 보이지 않는다. 일본군은 교훈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기보다는 이 전투를 잊어버리기에 급급했다. 장병들의 [[휴가]]와 서신 교환이 엄격히 제한되었으며, 본토로 귀환한 장병들에게는 육군 [[일본 제국 육군/헌병|헌병대]]의 감시가 붙었다. 전투에서 이탈한 장병들은 만주 들판의 [[마적]]이 되었다. 할힌골의 대패는 관동군과 군부의 [[언론플레이]]로 소련군의 침공 야욕을 격퇴한 분전으로 윤색되어 선전되었다. 참고로 현재도 일본 [[넷우익]]들은 당시의 선전을 그대로 인용, 소련군 병력이 일본군의 10배나 되었으며 그럼에도 동등한 피해를 입혔으므로 이긴 셈이라는 [[정신승리]]를 시전, 양심있는 우익들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고 있다. 그래놓고 '''사건'''이라고 축소하며 이겼다고 우기는 것은 모순일 따름이다. 이때 이후로 발전이 없다시피 한 일본 전차 부대는 [[태평양 전쟁]]에서 굴욕을 겪는다. 일본 외무상이던 [[도고 시게노리]][* 그에게는 박무덕이란 조선 이름이 있었다. 즉 조선계, 정확하게는 [[임진왜란]] 때 끌려간 사기장의 후손이다.]는 할힌골 전투를 비난하며 철군을 요청한 바 있는데, 나중에 [[미군]] 전차에 뭉개진 것을 듣고 그 때와 달라진 게 없다면서 한탄했다고 한다. 그리고 2차 대전 당시 [[전차병]]으로 참전한 [[시바 료타로]]도 전후에서야 할힌골에서 일본군이 소련군에게 대패한 걸 알자 자신이 전차병으로 목격한 일이나 할힌골에서나 전혀 다를 게 없었다고 한탄했다.[* 태평양 전쟁 당시, 시대에 뒤떨어진 일본의 전차들은 미국의 전차들을 상대로 아무런 성과를 낼 수 없었다. 미국의 [[스튜어트 경전차]] 한 대를 상대로도 중전차를 상대하는 양 쩔쩔맸으며, [[셔먼 전차]]를 마주했을 때는 '''초중전차'''를 마주한 것마냥 패닉에 빠지기 일쑤였다. 참고로 M4 셔먼 전차는 비록 가성비, 대량생산 측면에서 [[T-34]]와 자주 비견될 정도로 훌륭한 전차임은 사실이었지만, 고 스펙의 비싼 독일 전차들에게 연신 박살나면서 고생을 꽤나 많이 했던 전차다. 물론 현대 미디어에서 독일의 기갑전력이 과장되어 있기에 과대평가는 금물이지만, 가성비 문제와 더불어 논란의 여지가 있는 신뢰성과 별개로 순수 스펙, 화력, 장갑만으로 따졌을 때 독일이 참전국들 가운데 가장 앞섰던 것은 사실이다.] 할힌골 전투 당시의 일본 전차들은 당대의 여러 전차들과 스펙을 비교해 보아도, 정말 '''최약체''' 수준이었다. [[치로|89식 '''중전차''']]는 고작 보병지원용 유탄이 주화력이었고, 100m, 1,000m 거리에서 장갑 관통력이 모두 '''0'''이었다. '''명색이 중전차라는 놈이 이 꼬라지였다'''. 제대로 된 주포로 무장한 95식 경전차의 경우 사정이 나은 편이긴 했으나 [* 당시 일본은 경전차를 대전차용, 중전차를 보병지원용으로 제작했으니 대전차화력은 경전차가 더 좋아도 이상한 건 아니다.] 어디까지나 89식에 비해서 나은 것이지, 소련군의 전차들보다 월등했던 것은 결코 아니고 그저 최소한 전차 구실은 했다는 수준으로 볼 수 있다.[* 한편으로는 이 정도로 빈약한 일본군 전차들을 상대로 기습을 허용하고, 일본군 전차는커녕 보병들에게도 쩔쩔매다가 꽤 많은 수의 전차를 손실한 소련군을 보고 대숙청의 여파가 어느 정도였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소련군은 주코프와 같은 일부 명장들을 제외한 대부분의 엘리트 장교들이 대숙청으로 사라졌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신임 장교 혹은 전투나 훈련경험이 부족한 오합지졸들이었다. 대한민국 국군식 은어로 말하면 [[짬찌]]들인 셈이었다. 이런 오합지졸 군대를 상대로, 태평양 전쟁이 일어나기 전까지 동아시아 최정예이자 베테랑이라 할 수 있는 [[관동군]]이 패배할 정도면 당시 관동군 지휘부와 이들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대본영이 얼마나 무능했는지 알 수 있다. 지휘부도 지휘부거니와, 조직 문화와 체계의 문제라고도 볼 수 있다.] 그러나 이 정도 수준의 전차들을 가지고서도 단 한 번도 제대로 된 개량을 시도하거나 흐름에 맞춘 제대로 된 중전차를 개발하지 않고 외면하기 급급했으며, 뒤떨어지는 기술력과 경제력으로 인해 멸망할 때까지 미군 기갑부대와 격차를 좁히지 못했다. 독일의 항복 이후에도 계속 잔존해 있던 관동군은 정예사단들이 거의 다 차출되어 빠지면서 계속 약화되었다. 그러다가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의 [[만주 작전]]으로 1945년 8월 만주국이 멸망하고 관동군 역시 소멸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